2008년 02월 17일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퍼온글)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
- 1부. 낭만적 환상과 내재적 리얼리티 -
황현서
1. 들어가며
환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환상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환상문학 혹은 판타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져보았을 질문이며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몇몇 진지한 평론가들은 환상문학을 특징에 따라 중남미 환상소설과 장르적 판타지소설로, 혹은 경이소설과 경이적 환상소설, 공포소설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최근에 대두되는 퓨전 판타지나 무협판타지, 게임 소설 등 판타지소설 안에서 복잡미묘한 서브장르가 계속 생성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환상소설이 가지고 있는 환상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환상이란 무엇인가,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에서의 환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미 많은 문학가들도 질문해왔고 대답해왔으며, 환상문학이론으로서 체계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최근 들어서 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환상문학 이론들이 각종 문예지에 소개가 되기도 하고, 환상문학 이론서나 개론서들이 출간되는 등 학계에서 문학의 환상성에 대한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듀나의『태평양 횡단특집』이 출간되고, 박민규의『지구영웅전설』이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천명관의『고래』가 주목을 받는 것은 한국의 문학적 토양이 1997년을 전후로 얼마나 커다랗게 변화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이 환상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J.R.R.톨킨의『호비트』는 환상소설인가? 그렇다면 F.푸케의『물의 요정 운디네』는 과연 환상소설인가, 아니면 아동소설인가? 또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환상소설의 범주에는 넣지 않는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방랑아 이야기』나 노발리스의『푸른꽃』, 호즈슨 버넷의『비밀의 화원』은 환상소설이 될 수 있는가? 이영도의『눈물을 마시는 새』는 정말 동양적 환상소설일까?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발표당시 극명한 판타지소설로 논쟁의 불시를 당겼다가 지금에 와서는 평범한 ‘비’판타지소설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어떠한 분명한 대답도 내리지 못한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짧은 토양 위에서 이러한 문학의 환상성, 장르로서의 환상문학에 대한 진지한 문학적 성찰을 시도한 사람은 없었으며, 현재까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망설임의 문학,
문학의 환상성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간결한 이론은 캐서린 흄이 정리한 문학에서의 환상성에 대한 각 이론가들의 내용을 도표로 정리한 글이다. 흄은 각 이론가들의 유형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여 다양한 시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아쉽게도 각 이론가들이 주장했던 문학적 환상성의 공통적 특질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르문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며, 가장 필연적인 요소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영도의 소설과 김영하의 소설 중 무엇이 환상소설이고 무엇이 리얼리즘 소설인지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환상문학에 있어서 주요한 점은 문학에서의 환상성 뿐만이 아니라 바로 환상문학 자체의 특질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환상문학이론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바로 토도로프다. 토도로프는 문학에서의 환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에 ‘망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물론 토도로프가 그의 포스트구조주의 언어학을 바탕으로 문학의 ‘서술형식’의 연구대상으로서 장르 문학을 주목하였다는 사실은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정의한 문학 내에서의 ‘망설임’은 반드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토도로프는 문학을 작품내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 사이에 간극을 만들고 그 망설임 속에서 경이로움을 얻게 되는 환상문학과 장르문학의 주요한 특질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저서인『환상문학이론』에 따르면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화자가 그 세계에 대한 확고한 권위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말하는 경이소설, 미지의 세계와 알 수 없는 초자연적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공포소설, 그리고 현실과 세계 사이에서 독자의 망설임을 얻어내는 환상소설로 환상문학의 성격에 따라서 나눈다. 김예리는「1990년대 한국 환타지 문학」에서 토도로프의 정의를 따르면 톨킨의 소설들은 환상소설이 아니라 경이소설로 분류되며, 지금에 와서는 토도로프와 똑같이 정의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김예리에 의하면 지금 톨킨의『반지의 제왕』은 경이소설이 아니라 엄연한 환상소설로 읽힌다고 말한다.
여기서 김예리는 토도로프가 사용한 ‘망설임’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개념을 간과하고 있다. 토도로프가 말한 ‘망설임’의 개념이야말로 환상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며 가장 뛰어난 해석이다. 토도로프는 경이소설이 가지고 있는 화자의 도특한 문학적 권위와 그에 대한 전제 속에서 얻게 되는 즐거움의 대상을 우리가 말하는 환상문학에서 찾지 않는다. 토도로프가 경이소설로 구분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바로 ‘화자의 권위’가 인정되는 가장 오랜 문학인 풍자문학이다. 조나단 스위프트의『걸리버 여행기』나 그보다 더 오랜 풍자문학인 작자미상의 프랑스 우화시『여우이야기Roman De Renart』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화자가 풍자할 대상을 정해놓은 일차적인 권위의 세계 안에서 그것을 뒤틈으로서 문학적 즐거움을 얻게 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화자의 권위가 인정되어야만 성립하는 경이소설의 대표적인 장르는 SF문학이다. SF문학은 과학이라는 학문적 권위 위에서 소설의 세계가 구축되고, 독자 역시 그것을 생각하고 읽는다. 그렉 이건의『쿼런틴』은 양자역학과 나노공학이라는 과학적 권위를 상정하고 있으며, 테드 창의『당신 인생 이야기』에서는 사고실험이라는 독특한 사항을 독자도, 화자도 암묵적으로 승인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경이소설은 이처럼 ‘완전히 약속된’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공포소설은 가장 원초적인 문제들에 대한 누미노제적 접근을 기반으로 한다. 에드가 앨런 포의『검은 고양이』에서 보여지는 섬뜩한 고포, E.T.A.호프만의『모래사나이Sandmann』에서 코넬리우스와 나타나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신착란적 광기들은 모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기괴할 정도로 일그러진 심리를 작품에 묘사하게 된다. 공포소설의 섬뜩함은 즉, 누미노제적 머뭇거림에서 드러나는 식은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환상소설은 어떨까? 이런 환상소설의 텍스트로는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바로 중남미 소설들이다. 보르헤스를 필두로 오사리오 키로가, 비오이 까사레스, 환 룰포, 카를로스 푸엔테스, 이사벨 아옌데같은 중남미의 ‘환상적 사실주의’ 혹은 ‘경이적 사실주의’라는 흐름은 토도로프가 말한 ‘망설임’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 중남미 환상소설에서 작품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지극히 일상적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보편적 정서를 가지게 한다. 하지만, 그 보편적 리얼리티가 작품 내에서 스스로 균열을 만들고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으로 전회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바로 그 때 독자는 평범한 사건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어떤 현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것의 생경함에 머뭇거리게 되고 인식을 망설인다. 토도로프가 환상소설로서 망설임을 말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때 리얼리티는 돈키호테적이고 노벨라Novella적인 근대적 리얼리티에서 벗어나 비로소 J.R.R.톨킨이 지적한 내재적 리얼리티로 이행하게 된다.
토도로프는 이 장르문학의 구분을 독자가 인식하는 ‘약호체계’―판타지소설로 말하자면 캠페인이나 세계관―의 서술형태를 규정하고 이 내용들을 분류했다. 하지만 김예리는 우리가 지금 톨킨의 소설을 읽고 느끼게 되는 ‘놀라움과 망설임’을 이야기하면서 톨킨의 소설은 현재 환상소설로서 즐겁게 읽힌다고 반박한다.
3. 프랑스 신비평, 문학으로서 환상성
사실 토도로프가 환상문학이론에서 ‘망설임’을 제시한 이유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해서 문예비평에서 저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대 문학비평이론에서 이 프랑스 신비평, 혹은 독자반응비평은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던 비평의 분파로서 특히 장르비평에서 굉장한 의미를 가지는데, 오리-토끼 수수께끼는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관점에 따라서 ‘해석’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편다. 같은 그림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토끼로 보일 수도, 오리로 보일 수도 있는 독자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는 죽었다고 말한다. 텍스트의 의미(기의:Signifiė)는 다원주의적인 개인 무의식 속으로 끝없이 후퇴하면서 소멸하고, 기표(Signifiant)만이 부유하며, 해체된 기의들은 개개인의 독자들 속에서 무수하게 재생산되며, 그런 독자들의 재생산과 작가의 ‘언어필사행위’ 사이에 게임 같은 긴장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여 문학텍스트의 비평적 연구대상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한 탐구인 형식주의와 영미 신비평을 넘어서 텍스트를 수용하는 독자들을 문예연구의 대상으로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의 문학적 헤게모니가 독자의 승리로 끝났음을, 작가는 죽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롤랑 바르트 이후에 작가주의 비평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긴장관계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가장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른다.
많은 환상문학가들은 문학에서의 환상성에 대해 거론할 때 작가와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주목한다. 환상문학의 대가인 J.R.R.톨킨과 C.S.루이스가 특히 그러했고, 에릭 랍킨이나 로즈마리 잭슨 역시 마찬가지다. 토도로프 또한 독자의 ‘망설임’이라는 개념을 문예이론에 던져 놓았다. 그러므로 토도로프가 말한 ‘망설임’에 의한 환상문학의 분류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약속체계를 바탕으로 분류된 것이다. 김예리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톨킨의『반지의 제왕』이 처음 국내에 번역되었던 1992년 당시 이 작품은 분명한 환상문학이었지만, 소위 톨킨류라고 말하는, 서양중세를 바탕으로 한 2차세계에 대한 소설은 이제 더 이상 독자들에게 ‘망설임을 가지지 못한’ 장르로 인식되었고, 소설에서 용과 마법사와 공주가 나오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독자들 사이에서 장르판타지라는 하나의 ‘약속된’ 권위를 가지고 읽히게 되었다. 지금은 다시 톨킨의 소설이 ‘경이소설’로서 읽히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문학의 환상성은 독자의 반응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것이 토도로프가 롤랑 바르트 밑에서 신비평을 배우고 환상문학이론의 ‘망설임’을 말한 결정적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바르트의 신비평은 텍스트의 2차세계를 작가로부터 떼어버렸고, 전적으로 독자와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롤랑 바르트의 독자이론은 독자 수요의 입장에서 장르문학의 특징들을 고찰할 기회를 열어주었고,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의 장르적 특징을 ‘망설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환상문학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장르는 그것을 읽는 사람이 망설임을 가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경이감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에 따라서 범주를 나눌 수 있는, 굉장히 유동적이고 독자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그리스 고대 에픽(Epic) 서사시인『일리아드』와『오디세이아』, 오비디우스의『변신이야기』등과 더불어 중세 기사도문학―소위 로망스라고 불리는―을 판타지소설의 효시라고 꼽고 있다. 우리는 볼프람의『파르치팔』이나, 하인리히의『이바인』, 혹은 중세 독일 민중서사시의 대작인『니벨룽겐리트』, 단테의 『신곡』을 환상소설의 효시라고 말한다. 현대인인 우리들이 그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경이롭고 생경한 이야기들 속에서 ‘망설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은 이 이야기를 당시 그리스적 총화나 가톨릭이라는 패러다임 위에, 은총으로 가득찬 당위적 세계에서 펼쳐지는 낭만적 모험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작품들은 경이로운 회복효과(Recovery)를 가져다줄지언정 망설임을 가지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중세 서사문학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조지 오웰의『1984』는 그 당시 근시안적인 폭압적 상황을 예견한 훌륭한 SF소설이지만, 지금은 엄연한 리얼리티로 간주되고 있는 외삽적 작품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몇 년 전 국내에서도 환상소설이냐 리얼리즘 소설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불을 당겼던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살청부업자를 등장시키면서 완벽한 허구적 세계 위에 쓰여진 판타지소설이라고 지적되었지만, 이 소설이 출간되고 몇 년 뒤에 실제로 인터넷을 이용한 자살사이트와 자살청부가 실제화되면서 리얼리즘 속으로 편속된 경우라 볼 수 있다. 단테의『신곡-지옥편』은 당시 단테가 당파싸움에 있어서 자신의 당을 정당화하려했던 정치적 목적과 함께 그 당시 신학패러다임으로 거대한 신화체계를 이루려 했던 경이의 문학이었다. 하지만 지금 독자들은 이 작품을 훌륭한 환상문학으로 읽고 있다. 이것은 장르문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렉 이건이 2068년을 상정하고 써나간『쿼런틴』이 60년뒤 지구에서 거의 비슷하게 실제화된다면 미래에 읽힐『쿼런틴』은 SF소설이 아니라 단순한 의식의 흐름을 이용한 리얼리즘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 이상균의『하얀 로냐프강』이 중세 유럽에서 읽혀졌다면, 그 작품은 사랑의 비애를 담은 잔잔한 로망스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다.
토도로프의 ‘망설임’은 이렇듯 문학이 가지는 환상성이 어디에 연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지를 알아보는 데 가장 유용하고 훌륭한 창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4. 회복으로서의 환상문학 - 판타지가 가지는 미학적 특성
문학에서의 환상성은 이렇게 텍스트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관계에서 ‘발견된’ 개념이기 때문에, 시기와 상황에 따라 같은 문학작품도 달리 읽힐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문학의 환상성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된다면, 과연 판타지소설, 환상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본연적인 속성들은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사실 이 점은 환상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토도로프는 ‘망설임’의 개념으로 문학 내에서 드러나는 환상성의 관계를 규명하고, 문학 내에서의 환상성으로 장르문학을 규정하는 훌륭한 작업을 수행하기는 하였으나, 톨킨이나 수전 바클리, U.K.르귄 등 일련 대가들의 환상문학 작품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장르판타지,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아동문학의 환상성은 읽는 독자의 대상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된다는 사실로 범주를 규정할 뿐, 독자가 얻게 되는 망설임이 미학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는지, 어떤 문학적 ‘효과’가 있는지 주목하지 못했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쉽다.
이런 환상문학 내에서의 미학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그러니까 효용론적 관점에서 판타지소설, 환상문학을 접근하려는 시도를 했던 문학이론가는 거의 없다. 에릭 랍킨도 로즈마리 잭슨도, 캐서린 흄도, 심지어 토도로프까지도 이런 문학 내의 ‘환상성’을 구조주의적으로 문학의 텍스트 내에서의 하나의 언어로 상정하였을 뿐, 이런 문학의 하위장르인 환상문학, 혹은 문학 내 환상문학으로서 가지는 문학적 성과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러한 환상소설의 문학적 기능을 언급하고 설파한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20세기 판타지문학의 아버지이자 환상문학의 대가라고 불리는 J.R.R.톨킨이다. 지금까지 이런 환상문학의 문학적 효과에 대한 언급은 톨킨 이외에는 이렇다할 만한 텍스트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톨킨의 이론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될 필요가 있다.
사실 톨킨의 환상문학론은 구연으로 강연된 내용들 말고는 단편적으로 나아있는 논문들과 에세이들이 전부이다. 그의 글은 사변적이지도 않고 이론적이지도 않으며 매우 문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환상문학이 가지고 있는 아주 특이한 현상들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톨킨이 남긴 환상문학에 대한 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꼽히는『요정이야기에서On Fairy Stories』는 짧은 지면 속에 사실상 톨킨이 하고자했던 환상소설의 본질을 모두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톨킨은 문학 내에서의 호나상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르판타지로서―물론 당시에는 장르문학 자체가 없었다―환상문학이 가지는 특징들이 ‘이것이 바로 판타지소설이다’라고 규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당신이 만든 세계가, 다른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 잘 구축되어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판타지가 아닐까?”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환상문학의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고 다시 지적한다. 그러면서 다른 문학보다는 환상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특성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톨킨의 저 유명한 환상문학의 네 가지 효과이다.
톨킨은 이 글에서 환상문학이 다른 문학보다 더 많이 간지하고 있는 문학적-미학적 기능으로 환상(Fantasy), 회복(Recovery), 도피(Escape), 위안(Consolation)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상상력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환상은 개인-독자적 세계의 관련성을 상기하면 위에서 지적한 문학 내의 환상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환상문학의 본연적 속성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톨킨이 강조했던 환상문학의 가장 커다란 기능은 회복(Recovery)이다.『나르니아 연대기』의 저자이자, 그의 동료였던 C.S.루이스 역시 “환상소설에서 마법의 숲을 경험한 독자가 현재의 숲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의 위대함이다.” 라는 경이적 환상회복효과를 강조하면서 톨킨의 의견에 동조했다.
환상문학으로서 회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환상문학을 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톨킨이 가장 강조한 점이다. 환상문학의 나머지 두 가지 효과, 그러니까 현실로부터 참되게 도피하고 거기서 위안을 얻는 것은 모두 이 환상의 회복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톨킨은『On Fairy Stories』에서 환상이란 현실에 찌들어 얼룩진 우리의 불투명한 시야를 깨끗하게 닦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환상의 새로운 시선은 예컨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의 색이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 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 새로운 시야를 얻기 위해 검은색이나 갈색으로 칠해버리는 탈주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그런 탈주를 하기 이전에 우리들의 시야를 닦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빨강, 파랑, 노랑의 색을 다시 보아야 하고, 리얼리즘이라는 우리의 눈에 끼인 때를 벗겨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톨킨의 환상회복론은 캐서린 흄에 의해서 문학 텍스트의 환상성이 독자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호라티우스는『시학』에서 유명한 문학당의정설을 이야기하면서 문학의 훌륭한 두 가지 기능, 교조적 측면과 유희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문학론을 조율했다. 전통문학론에 있어서 문학의 뛰어난 가치라고 한다면, 아직은 고전적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유효한 이 두 가지 기능에 문학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 흄은 톨킨의 환상문학론을 제시하며, 톨킨이 말하는 환상문학의 효과는 작품이 텍스트의 2차세계를 뛰어넘어서 독자가 살아가는 세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독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변화는 교조적인 플라톤이나 유희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둘을 조율하는 호라티우스의 시학론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메신저 문학(Messenger Literature)로서 ‘회복’을 말하고 있다. 이 환상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가득찬 낭만적 환상의 세계이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시대 이후 총체성은 상실되고, 상실된 총체성 속에서 자아를 찾아 고독히 방랑하는 모험의 내러티브가 바로 소설의 발생과정이라고 말한다. 현대가 진행될수록 소설문학에서 등장하는 서사시적 총체성은 파괴되고, 파편화된 자아가 총체적 모험을 감행하는 고독한 모험의 길이 바로 소설미학이라고 루카치는 지적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현대 이전의 아무런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총화된 그리스적 시대를 낭만적 문학으로 상정하는데, 이런 낭만성은 톨킨과 일련의 환상문학 작가들이 말하는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톨킨은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회복효과가 바로 이런 신화시대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현대인에게 고대 그리스 서사시적 총체성을 ‘회복’하려고 한 낭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톨킨은 가장 과격하면서도 참신한, 문학 내에서 환상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작가였따. 그리고 그의 회복효과는 깨어진 총체성의 시대인 고독한 현대에 독자들을 다시 고대의 그리스-신화시대의 총체성으로 돌려보내고(도피Escape), 그 곳에서 위안(Consolation)을 얻으며, 다시금 고대 신화시대 인간들의 총체적 감성을 현대인들이 회복(Recovery)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톨킨의 걸작인 반지3부작―『호비트』,『반지의 제왕』,『실마릴리온』―이 현대인들의 신화라는 극찬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이유는 톨킨 스스로가 믿고 있었던 환상의 네 가지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서 온전히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루카치적 관점에서 분명히 도피주의적이고 위안적이지만 동시에 회복적이고―톨킨이 스스로 말했듯이―복음적이다. 자아마저 상실돼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톨킨은 고대로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자의 현실에서 참되게 도피하고 거기서 위안과 회복을 얻는다는 점에서 장르판타지는 문학의 하위장르로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문학의 특수성으로서 판타지소설을 이야기한다면,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위대한 특수성은 바로 이 회복과 위안임이 분명하다.
톨킨이 말한 환상소설의 네가지 회복효과 중에서 물론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상상력에 바탕을 둔 환상(Fantasy)이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문학 내에서 환상의 정의는 유동적이고 독자중심적이다. 따라서 이 환상의 개념은 규명될 수 있으나 규정될 수는 없다. 톨킨은 말한다. “나는 판타지가 무엇인지 규정하려 하지 않겠다. 왜냐면 나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에 드러나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 환상성의 특징을 가지고 리얼리즘 문학과 환상문학을 구분하는 작업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작품 내에 드러나는 일관된 경이로움과 그에 따른 회복효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환상성 차원을 뛰어넘어서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월적-문학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즉, 요정이 등장하고 마법사와 전사, 공주와 용이 등장하는 작품이 환상문학이 아니라, 문학작품 내에서 일어나는 암시적인 경이로움이 작품의 내러티브 전체를 이끌어나가면서, 거짓말같은-허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의 파국에 가서는 결국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야 마는, 거기서 커다란 하나의 회복을 줄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장르판타지문학을 가름하는 주요한 특징인 것이다.
영국의 여류작가인 호즈슨 버넷의 대표작으로, 아직도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소설로 자주 회자되는『비밀의 화원』의 경우를 보면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지리라 생각된다. 이 작품에는 용도, 마법도, 신(神)들이나 왕자, 공주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19세기 후방의 조용한 영국 시골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그저 ‘어린이문학’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지나쳐버린다. 그러나 이 작품이야말로 톨킨이 말한 내재적 리얼리티를 안고 독자들에게 거대한 회복의 감동을 안겨다주는 환상문학-장르판타지 소설의 걸작임은 분명하다.
이 소설은 언뜻 보면 평범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교훈적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좀 더 리얼리즘에 훈련된 눈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은 개연적으로 납득할만한 사실이 거의 없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새와 대화하는 노인, 우연히 발견되는 열쇠같은 사건들이 가지는 리얼리티의 부재(不在)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화원을 가꾼다고 해서 못생긴 아이가 예뻐지고, 다리를 못 쓰는 아이가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들이 화원을 가꾼다는 사실을 모르는 스튜어드 남작조차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의해 자신이 변화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한 이야기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비밀의 화원』은 이렇게 언뜻 보면 교훈적이고 일상적인, 모순에 가득찬 이야기들을 테두리에 쳐놓고, 그 내부는 매우 치밀하고 교묘하게 짜여진 판타지소설이다. 이 작품은 이미 톨킨이 지적해던 ‘내재적 리얼리티’를 총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자연―조금더 분명히 말하자면 꽃과 나무, 새들―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회복적 시야’가 진하게 녹아있다. 그것은 위에서 지적한 현대적 리얼리티―꽃을 키우면 아이가 예뻐진다는 사실을 거부하려하는―와 대비되는 작품 내에서 인정되는 리얼리티, 즉 톨킨의 용어를 빌리면 내재적 리얼리티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내재적 리얼리티가 이야기 전체를 꿰뚫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축복’이다. 톨킨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서 ‘신의 은총’의 내재적 리얼리티를 가지고『반지의 제왕』을 써나가며 중간계 속에서 가장 완전무결한 내재적 리얼리티를 구현했듯이,『비밀의 화원』은 현실세계와는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자연의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한’ 내재적 리얼리티를 서사적 총체성의 중심에 두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예를 들면 붉은가슴울새의 인도로 메리가 비밀화원의 열쇠를 찾는 이야기―은 우연이 아니라, 자연의 은총으로 묶여있는 거대한 ‘당위성’ 속에서 성화(聖化)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런 내재적 리얼리티는 매우 경이롭고 일관되어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자연과 화원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우연적이고 경이로운 사건들은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사실 자연에 대한 은총으로 총화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당위적 사건들의 자연스러운 연속이라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따라서―내재적 리얼리티와 총체성으로 구축된―일상적인 사실들임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운 회복을 가져다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작품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독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필수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대단원의 해피엔딩(Happy Ending)에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판타지소설이 가진 회복의 마력이며, 문학의 하위장르로서, 환상문학이 가지는 문학적 특수성이다.
‘인류의 영원한 동화(童話)’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헨도르프의『방랑아이야기』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말하는 소위 ‘판타지’적인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기사도 없고, 용도 없고, 마법이나 신비한 항아리, 사랑의 묘약같은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독일 낭만주의작가들의 정신이 그러했듯이, 아이헨도르프 문학의 핵심은 ‘중세 유럽적 정서의 문학적 복원’이었고『방랑아이야기』에서 찬양하는 중세적 정서 혹은 내재적 리얼리티는 바로 프랑스 기사시인 벵따도른Ventadorn의 서정시나 작자미상의 라이(Lais-짧은 로망스 형식의 서사시)『랑발Lanvall』등에서 드러나는 먼 곳의 동경(Distant Love)이다. 이러한 중세적 낭만성으로 총화된 아이헨도르프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건이 일상적이고 현실적이지만, 그 내밀한 부분에 담겨있는 이러한 중세 서사시적인 내재적 리얼리티는 신(神) 내려준 자연의 은총에 의해 회복적 시야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위 작품은 우리가 소위 ‘판타지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판타지 소설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효과인 ‘회복’과 ‘도피’와 ‘위안’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내재적으로는 ‘경이로움’이라는 ‘환상효과’를 바탕에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장르판타지로서의 환상문학이 가지는 문학적 특수성이 ‘환상’과 ‘회복’이라고 한다면, 위의 두 작품같이 내재적 환상과 회복을 가진 작품도 당연히 장르판타지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반드시 언급해야할 필요가 있다.
5. 문학으로서의 ‘환상문학’
지금까지 우리는 문학이 가지는 본연적 환상성과 문학의 하위개념으로서 가지는 판타지소설의 문학적 특수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성격들은 모두 환상문학이 가지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이며 더불어 다른 문학작품보다는 특히 더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판타지소설이나 장르문학들을 진지한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연구하려들지 않는다. 대학 영문학부에서 간혹 J.R.R.톨킨이나 C.S.루이스의 강의가 개설되는 일은 있지만, 로저 젤라즈니나 로버트 하인라인이 연구되지는 않고, U.K.르귄이나 수전 바클리 역시 ‘문학부’ 강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J.R.R.톨킨의 경우도『반지의 제왕』이 20세기 영문학 흐름의 ‘이단’으로 취급되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던 작품으로 연구될 뿐, 문학작품의 하나로서 진지하게 비평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여전히 기성 문단에서는 SF와 장르판타지, 풍자문학이 진지한 문학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문단에서는 문학의 환상성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문화적 게토(Ghetto) 내에서 자생한 장르판타지나 SF문학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비평가들도 윤대녕이나 김영하, 한유주, 배수아, 박민규 등 작가들의 문학적 환상성에 대해서는 심도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영도나 이상균, 전민희 등의 판타지소설 작가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런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많은 판타지소설과 SF문학 게토(Ghetto)의 독자들과 작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기성 문단의 폐쇄성과 독단성에 의해서 장르문학이 하나의 진지한 문학으로 수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반대로 SF문학과 판타지소설같은 환상문학 계열의 작품들은 토도로프가 말한 ‘서술체계의 문법’, 즉 경이소설로서 화자의 권위를 상정해야하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작품을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결국 장르문학 측의 입장은 기성의 문단이 너무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하지만, 기성 문단의 입장에서는 장르문학, 특히 장르판타지소설은 게임이나 톨킨류 소설에서 파생된 외국 장르문단의 사생아라고 말하며, 문화상품으로 가치가 있을지언정 문학적 가치는 없다고 지적한다.
강수백은 이 점에 대해서 매우 날카로운 지적을 내린다.
“한국 판타지소설의 90%가 쓰레기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수문학의 90%도 마찬가지다.”
김예리는 아직 우리 문단이 판타지와 장르문학을 포용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면서 대답을 보류한다.
판타지문학이 ‘문학’ 내에서 하나의 진지한 멤버로 받아들여지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많은 문학가들의 의견이 오갔지만, 논쟁은 평행선을 달릴 뿐, 서로 공유되는 지점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다. 강수백의 경우는 판타지소설이 ‘키즈문학(Kids Literature)’으로서 기능을 하면서 문학 입문층의 서적으로 널리 읽히면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이다. 환상문학은 분명 경이와 환상의 장르로서 독서에 낯선 독자층을 빠르게 독서층으로 흡수하는 순기능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장르문학의 존립의의는 결코 아닐 것이다. SF와 장르판타지, 그리고 아동문학을 총괄하는 환상문학은 이런 논쟁을 펼치기에 앞서서 기성 문단에게 SF와 장르판타지문학은 ‘문학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조화로움을 장르문학도 똑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르문학도 문학의 한 소속멤버다!’ 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아동문학도 분명한 ‘문학’의 서브장르다. 그러므로 이것들 역시 ‘문학이 공유하는 미적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쉽게도 이 점에서 한국 판타지와 SF문학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작가들은 거의 없다. 하응백이『한국 팬터지문학의 허와 실』에서 이영도의『드래곤 라자』를 대상으로 판타지 문학의 여섯가지 특징을 밝혀내면서 한국 판타지소설의 문학적 허점을 드러내보인 것은 분명 타당하다. 하지만 김예리는『1990년대 한국 판타지문학』에서, 시적인 문체인 이상균의『하얀 로냐프강』이나, 절대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방지나의『마왕의 육아일기』, 탄탄한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는 전민희의『세월의 돌』등을 이야기하면서 하응백의 이 구조로는 한국에서 드러나는 판타지문학의 특징을 조명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응백의 주장은 김예리의 주장보다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하얀 로냐프강』이 시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시적인―엄밀히 말하자면 중세적인―고고한 느낌들은, 리듬감있는 운율을 바탕으로 하는 톨킨의『호비트』나 고트프리트 슈트라쓰부르크의『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노래처럼 넘어가지는 않는다. 감각적인 묘사들은 이상균의 강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런 감각적이고 세밀한 묘사들 하나하나가 작은 에피소드에 묻어나가면서 더 큰 묘사로 발전하고, 그 커다란 묘사로 스케치되는 하나의 사건들이 콜라주처럼 붙여나가며 더 큰 장르판타지로, 말하자면 ‘거대서사’로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분명 이상균의『하얀 로냐프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 대중 판타지소설 독잗르은 감각적 묘사와 시적 문체를 혼동하고 있다. 이런 시적 문체의 내러티브가 소설 안에서 기능되는 점을 비교해보려면, 이상균의『하얀 로냐프강』과 로저 젤라즈니의『전도서에 비치는 장미』를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이것은『드래곤 라자』로 대표되는 한국 판타지문학의 기수라고 불리는 이영도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영도의 소설을 읽는 많은 팬들은 그의 소설은 센스있고 유머러스한 재치있는 문장과 대사가 감상의 포인트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영도의 이런 언어적 재치는 톨킨이나 중세유럽적 금언에 상당수 기반하고 있으며,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셰익스피어식(式)의 민스트럴(Minstrel)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재치있고 민스트랄적인 금언들은 ‘대사’로서 작품 안의 하나의 ‘드러냄’을 보여주는―그러니까 내면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는―희곡문학의 핵심으로 부각되지만, 이영도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금언들은 단편적이고 산발적으로 퍼져있다. 이런 금언들은 읽는 순간 감탄을 받게 되지만, 이런 금언들이 하나의 문학적 아우라(Aura)를 가지고 구심점이 되어 하나의 거대서사를 이끌어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적으로 이러한 기능들의 ‘버려짐’은 전체적으로 구조적 미학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드래곤 라자』에서 눈 먼 핸드레이크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도움을 주고, ‘12인의 다리’에서 여러 종족들의 조화를 끌어내는 부분들에서 보여지는 경이로움은 판타지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과 ‘경이’의 매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드래곤 라자』는 그러한 판타지문학으로서의 특수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편소설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거대서사적 내러티브는 굉장히 허술한 작품이다.
이런 장르판타지를 문예비평적으로―문예비평이란 모든 문학이 문학일 수밖에 없는, 모든 문학텍스트가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속성을 분석하는 과정을 말한다.― 분석을 해보면 그 미학적 구조가 상당히 허술하고 잘 잡혀있지 않기 때문에, 기성 문단은 당연히 장르문학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 판타지의 붐이 일고 있던 2000년에 야심차게 출간된 단편소설『윈드드리머』를 읽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글을 평론을 받은 박상준의 선별 서평을 읽어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방지나의「윈드드리머」는 깔끔한 스토리라인을 바탕으로 한 자유에 대한 소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지극히 직선적이고 평범한 플롯구조를 가지고 뻔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습작 소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함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직위에 대한 암시적인 문구들은 암시적이지 못하고 그 내용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으며, 결국 희생과 자유에 대한 두 가지 주제를 융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행글라이더의 ‘바람’을 이용한 비행선으로 서민들을 탈출시키고 ‘희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마지막 이야기 역시 단조롭고 식상하다.
강시현의「1998년 여름의 폭우, 용」의 경우는 장르판타지로서 텍스트가 가지는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박상준이 지적했듯이 토속적 환타지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수호신’이라는 동양적 시야를 현대를 배경으로 매우 놀랍게 회복―톨킨적 용어로서―시키고 있으며, 더불어 마지막에 화자가 술회하는 시장의 급격한 현대화를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톨킨이 지적한 ‘좋은 의미로서의 파국’, 그러니까 대단원에 이르러 가지게 되는 이런 회복의 해피엔딩을 매우 놀라운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 구조나 작품의 내러티브가 거칠고, 문체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부분들을 박상준은 놓치고 있다. 이 작품은 환상적인 시야를 매우 놀랍도록 잡아낸 걸작이지만, 문학의 한 멤버로서, 단편 소설의 미학에는―서사적 내러티브를 제외하면― 벗어난 매우 아쉬운 작품이다.
「중국의 달」역시 마찬가지의 경우가 적용된다. 이 콩트는 SF판타지적 인식의 신선함과 회복의 미덕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단편이 가져야 할 응축성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습작수준의 단편에 머물고 있다.
「듀러왕의 전설-천인공로할 결투」는 패러디풍자소설, 즉 토도로프가 말한 경이문학으로서의 미덕을 아주 잘 재현한 소품이다. 이 작품은 경이소설의 내재적 리얼리티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이 단편집의 유일한 준작이다.
듀나는 그나마 장르문학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적 성과를 얻고 있는 한국 작가이다. 대표작이라 볼 수 있는『면세구역』은 사진예술이라는 다른 매체를 가지고 SF적 사고실험을 이용하여 현실에 덧붙여넣는 콜라주라는 기법으로 작품 전체를 채워넣은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작품의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모두 한 장의 ‘사진’으로 묶어 처리해버리고, 거기에 에피소드의 레테르를 붙여버리는 매우 경쾌한 기법으로 총 다섯 장의 사진-혹은 이야기-을 늘여놓고, 작품 제목 격에 해당하는 에필로그에 SF사고실험의 이야기를 간결하게 주석달아놓은 이 실험작은, 물론 보르헤스를 비롯한 노벨라 네그라의 오마주적 향취가 매우 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을 훌륭히 접목한 주목할 사례로 남을 만하다.
이영도의『오버더호라이즌』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면서 이영도의 작가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영도가 지금까지 작품들에서 늘 주목해왔던 ‘조화와 화해’에 대한 테마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영도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는 금언적이고 유머러스한 문장, 그리고 재미있는 장면들의 연결은 단편소설이라는 장르미학적 특성과 최악의 미스매치를 빚어내고 말았다.『오버더호라이즌』은 오크보안관, 악기살인자 등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톨킨이 지적한 ‘회복의 눈’을 가지고 있는 매우 인상적인 단편이지만,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환상문학 특유의 하이브리드 에고Hybrid Ego적인 소재들이 작품의 이야기에 분명하게 스며들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긴밀한 긴장관계라든지, 문장과 문장 사이, 문맥간의 숨겨진 메시지들의 연결고리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단편소설이 가질 수 있는 구조적 미학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를 연구한 영미 신비평가가 이 작품을 읽었다면 ‘독특한 소재가 아쉬운 미완성작’이라는 말을 하며 싱거이 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한국 장르문학의 허점은 이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나, 작품을 평론하는 평론가들이나 모두 장르적 게토 안에서 가지는 장르문학의 독창성만을 기준으로 삼고, 정작 문학이 가지는 문예미학적 특질, 비평적 시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정은 SF문학에서도 다르지 않다.
하인라인의「지구의 푸른 뫼」같은 경우, 하인라인의 보수적 성향이 반영된 뛰어난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라고 많은 SF팬들이 칭찬하지만, 이 작품 안에 담겨있는 켈틱 바드Bard적인 요소들과 이야기 진행이 가지는 짧은 연대기적 성격―전세계 민요들이 가지고 있는 짧은 라이(Lais)적 특징들―에 대해서 주목하는 SF독자들은 거의 없다.
그렉 이건의 문제작인『쿼런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번역자인 김상훈씨의 후기를 읽어보면, 이 작품이 양자역학이론을 매우 새롭게 풀어낸 하드SF의 걸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김상훈은 이 작품이 자유와 격리에 대해서 삼중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드에 지배당한 닉의 자아정체성’→‘양자역학의 확산과 수축’→‘지구의 관측행위와 쿼런틴 버블’이 가지는 중층적이고 굉장히 집중력있는 뛰어난 플롯적 조감(造感)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이 하드SF로서 SF팬들에게 찬사를 받는 것은 SF라는 장르문학적 특징이 십분 담겨있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더불어 ‘SF문학의 조이스’라고 별명을 붙여도 될 정도로 복잡한―그것도 양자역학의 특징을 이용한―의식의 흐름기법을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결국 닉이라는 주인공의 자아정체성을 탐구하는 모험으로 귀결되는 뛰어난 문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SF독자들은 간과하고 있다.
6. 장르적 환상문학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
SF문학, 판타지문학, 그러니까 환상문학 내에서도 문학의 엄연한 소속멤버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 국내 작가들이, 위에서 살펴본 듀나의『면세구역』이나『태평양 횡단특급』, 그리고 본격문학에서 더 많이 거론되는 복거일의『비명을 찾아서』,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박민규의『지구영웅전설』, 교묘한 판타지소설인 배수아의『동물원 킨트』, SF와 문학의 줄타기에 능한 김중혁의『펭귄뉴스』등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았으며, 외국장르문단에서도 톨킨의『호비트』, 수전 바클리의『흑장미 기사』, 어슐러 르귄의『어스시의 마법사』, 그렉 이건의『쿼런틴』, 테드 창의『당신 인생 이야기』, 로저 젤라즈니의『신들의 사회』, 필립 K. 딕의『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블레이드 러너)』등이 장르문학이면서 동시에 문학적 성과를 안고 있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반대로 국내에서는 아동문학으로 폄하되지만 분명 환상문학의 기질이 충만한 미하엘 엔데의『자유의 감옥』, 호즈슨 버넷의『비밀의 화원』, 미야자와 겐지의『은하철도의 밤』,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의『크라바트』, 요한손의『바이킹 소녀 헬가』, 잭 런던의『야성의 부름Call of the Wild』등이, 그리고 낭만주의 문학 내에서만 조명되는 F.푸케의『물의 요정 운디네』, 아이헨도르프의『방랑아이야기』, 노발리스의『푸른꽃』, 휠덜린의『히페리온』, 페로의『장화신은 고양이』, 도데의 단편들(산문으로 쓴 환상시,『스강 씨의 염소』,『황금두뇌를 가진 사나이』外 다수)등, 환상문학의 특성이 보여지는 ‘문학’작품들은 오히려 환상문학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장르-환상문학의 지평확대의 차원에서, 더불어 진지한 문학의 한 멤버로서 이들 작품은 반드시 되돌아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본격 문학이 가지지 못하는 환상문학만의 특수한 매력들과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장르문학의 특수한 관점에서 이 작품을 고찰해 보아야할 필요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문학도 분명 문학이라는 언어예술의 하위장르인 만큼, 문학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성찰을 병행해야할 것이다. 물론, 장르문단 내에서도 대중적인 작품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격문학에서도 늘상 마찬가지다. 문제는 대중적이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는 장르문학 내에서도 ‘문학적 위상을 갖춘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장르문학과 환상문학의 위상을 기성문단이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장르적 게토 안에 거주하는 독자들과 작가들 역시 장르문학을 하나의 ‘문학’으로 인식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들은―혹은 그 안에서의 진지한 비평가들은―SF의 인식소Epistēmē를 말하기 이전에 로만 야콥슨의 지배소Dominant를, 톨킨의 회복Recovery을 말하기 이전에 루카치의 총체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 가지 시각을 칸트의 윤리학처럼 조율하면서 작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영도와 전민희, 방지나, 김예리, 이상균 등 판타지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장르판타지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본격문학적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우리는 이상균의『하얀 로냐프강』이 시적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문학적 지위를 갖추었다고 말하기 이전에 판타지 독자들이 칭찬하는 ‘시적 문체’가 안고 있는, 서양 서사시의 번역문체적 허점을 발견해야 하며, 더불어 소설 내에서 한글적 문체에 어울리는 서사적이고 시적인 문체의 독특함을 극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박상륭의『죽음의 한 연구』에서 보여지는 판소리 사설조 시적 문체의 서사적 진행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환상문학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멀다. 장르문학이 가지는 게토(Ghetto)적 미덕과 더불어 문학적 설득력을 가지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그 현상들이 중남미의 노벨라 네그라처럼 문학의 특수현상으로서 진지하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장르문학의 게토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문학이라는 언어예술이 가지는 보편적 속성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본격문학의 독자들도 SF나 판타지같은 장르문학, 그리고 아동문학이라고 부르는 환상이야기, 경이의 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우화와 패러디소설등 중에서도 문학적 가치를 공유하는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벨라 네그라와 포스트붐 소설의 등장 이후 장르-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는 사라졌다. 이사벨 아옌데나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같은 작가들은 영화와 TV드라마에 등장하는 기법까지 소설의 영역을 끌고 오면서 매체장르적 특성까지 개방했다. 이제 문제는 장르문학이냐 본격문학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하위개념으로서 판타지와 SF, 요정담(Fairt Tale)의 특수성들이 하나의 문학매체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로 넘어가야할 때다.
2부 - 포스트모더니티를 넘어서
이 기획을 질질 끌다가, 며칠전 백수가 된 김에, 한큐에 끝내버리자고 맘 잡고 쓰는 글입니다. 문예 이론에 대한 이야기들은 1부에서 할말 다 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판타지를 되짚어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써보았습니다. 몇번 손질한 1부와는 다르게 초고이기때문에 고쳐야할 부분이 매우 많으므로, 이점 양해바랍니다.
역시 각주는 아래에 달았지만, 1부에서처럼 필연적인것은 아니니, 천천히 참고하시면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
1. 타자와 포스트모더니즘 - 문학에서 차지하는 환상성의 위치
20세기 문학계의 가장 커다란 쟁점들은 바로 중남미 문학이 주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20~1930년대 보르헤스의 상호텍스트에 이어서, 중남미 샤머니즘과 유럽의 리얼리즘이 약간은 불편한, 그러나 성공적인 동거를 시작한 오사리오 키로가, 로아 바스토스, 비오이 카사레스 등의 중남미 작가 군은 푸코가 지적한 '타자'로서의 문학적 쟁점을 본격적인 도마 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세계 문학의 흐름은 급격히 재편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술적 사실주의가 위치하고 있다. 사상사적으로 훓어보자면, 이러한 제3세계 문학의 주체화는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시대적 맥락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유럽의 정신사는 다원적 주체의 파괴, 즉 신화의 파괴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한다.(주1) 다원론이 인정되는 신화체계는 곧 이데아라는 절대적 이념으로 통합되면서 소멸해버리고, 여기서 철학은 시작된다.(주2) 그리고 그런 일원적 주체는 스콜라 철학에 의해서 일신론으로 구축되었다가, 다시 데카르트에 이르러 개인이 내재한 보편자아로 편속된다. 이 점은 문학사적 맥락을 짚어보아도, '총체적 시대'의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신의 섭리 아래서 인간사가 구축되는 볼프람의 서사시로, 그리고 다시 그것이 인간의 '인식'으로 귀결되는 세르반테스의 소설들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그다지 신용 없는 주장은 아닌 듯 하다. 문학적 주체는 처음 문학이 시작되었을 때는 완전무결한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갖추고 있다가,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파괴되고, 자아로 수렴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주3)
19세기 후반부터 급격하게 표면으로 떠오르는 과학은 철학의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서양철학 최대의 숙제였던, 세상을 설명하는 존재론은 이미 생물학과 물리학으로 역할이 넘어갔다. 과학과 이성 스스로에 의해서 철학은 변증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20세기 철학이 '존재론'을 붙잡고 설명하지 않으려는 이유, 그러니까 현대 철학의 주 흐름중 하나인 '언어 문제(혹은 언어학적 전회)', '실천적 비판', '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각은 그러므로 20세기 철학이 나아가야하는 필연적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4)
문학의 입작에서 흥미롭게 짚어볼 수 있는 철학적 성찰은 탈 형이상학적 사유, 그 중 가장 중요한 흐름중 하나인, '주체의 해체'와 연관되어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다시금 하버마스를 인용하자면, 다원론의 죽음으로 시작된 '일원론'의 서양철학은 주체의 왕좌를 잃으므로 인해서 '타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성의 정황화' 즉, 이성은 주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핵심이다. 푸코가 '광기'를 문화의 전면적 화두로 부각시킨 것도, 이성에 의해서 억눌려 있던 '비이성'적인 문제들이 이성이 정화화되면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성의 정황화'는 문화전반에 폭풍의 핵으로 작용하였고, 그 범위는 철학적 '타자'부터 에코페미니즘(생태주의)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이성의 정황화는 어디까지나 유럽의 근대철학의 입장에서의 '이성의 정황화'이다. 세르반테스기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한 이후로, 문학이 가지는 근대적 리얼리티는 '주체자아의 반성'에 그 핵심적 쟁점이 담겨져 있었다. 문학은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로서 기능하였고 언제나 문학은 부메랑이 돼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주5) 물론 문예사적으로 바로크와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언제나 줄다리기처럼 팽팽하게 연결되어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이성의 패러다임은 근대를 움직이는 추진력이었고, 이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가 붕괴되는 20세기에 이르러 리얼리즘 문학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자아는 더 이상 자신에게 없다는 사르트르에 이르면, 자아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근대 문학의 핵심은 즉 '자아의 리얼리즘'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주체를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성을 절대적 가치로 상정한 고전주의 문학이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設)을 이야기한 플로베르의 자연주의, 세상을 통찰력으로 바라보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까지 꿰뚫고 있다. 하지만, 철학적 헤게모니가 주체가 아닌 '타자'로 넘어간 이후, 이성은 정황화되고, '나'의 부재로 인한 '너'의 존재가 문학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푸코는 이 아이콘을 '광기'라고 말하고 있으며, 프로이트와 융은 '무의식'이라고 정리한다. 니체가 '초인'을 동경했던 이유는 리얼리즘 속에는 '더러운 피부병'이 있으며, '신은 죽었기 때문'이다. (주6)
그렇다면 문학은 어떤가? 근 300년간 리얼리즘으로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문학의 축은 붕괴된다. 데카당스, 미래파, 모더니즘. 19세기후반~20세기 초엽에 발생한 문예학적 특징들은 이러한 붕괴된 이성 속에서의 제자리찾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면서, 문학적 '타자'들에 초점을 맞춘 작가들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타자로 억압받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조명되다가, 결국 사후에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 이름들은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보들레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것들이다.
이 작가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쓰는 작품의 테마가 바로 '타자'에 대한 것들이다. 카프카는 작가 스스로가 바로 유럽의 타자인 유태인이었으며, 보르헤스는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의 작가였고, 보들레르는 인간의 광기에 대한 탐미적 집착을 보여왔다. 문학적 테마가 타자로 넘어가는 순간에 있는 이 작가들의 작품들은 문학적으로 적어도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성적 리얼리티의 부정이다. 그들은 리얼리티를 '허상'으로 간주하며 리얼리티가 아닌 것들에 대한 삶의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토마스 만이 카프카를 '문학 사상 가장 읽을만한 작품'이라고 추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주7)
보르헤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작품은 매우 복잡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크게 세가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유럽 카톨릭에 억압되 있던 중남미 토테미즘의 전면적 부각, 둘째로 기존 문학이 가지는 서술적 허구성의 파괴, 그리고 셋째로 장르문학의 본격적 수용이 그것이다.(주8)
이런 작가군들의 작품에는 타자와 함께 문학과 예술에서는 '환상'이라는 것이 이성의 대결도구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있던 위치의 작가들일수록 이런 점들은 두드러지게 보인다. (사회적 타자였던 고흐의 신인상파적 작품들이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니체의 중요한 작품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철저히 이성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을 참작해보아도 충분히 개연적인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들의 영향이 전반을 지배하는 20세기 문학의 형식은 주체에 반대하는 타자, 이성에 반대하는 환상으로 그 커다란 특징을 거칠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판타지'를 문화적 담론의 핵심쟁점으로 삼는 것은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바라보는 창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그것의 뒤에는 '자아가 파괴된 곳에 존재하는 타자와 이성 뒤의 환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환상문학의 목소리 - 마술적 사실주의
타자를 문학의 머리로 올려놓는데는 사실 일련의 영미 SF/판타지 작가들과 중남미 작가들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남미 작가들은 테마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근대 리얼리즘 소설들을 철저히 배격하므로써, 자신의 위치를 타자로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50년대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하나인 멕시코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경우는 중단편 <아우라>에서 이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 작품은 서술인칭부터가 1인칭이 아닌 2인칭, 즉 '너'가 소설의 주체화자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첫 문장은 "너는 그 광고를 본다." 따위의 것들이다. (주9) 이것은 문학기법적으로도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을 매우 독창적으로 해체한 경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품 안에서는 일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주체에 대한 타자들을 테마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의 배경은 '도심의 주택가'가 아닌, 도시로부터 벗어난 교외 변두리의 낡은 집이며, 식민지시대에 활약했던 100여년전 스페인 출신 멕시코 장교의 일기를 번역하면서 얻게되는 주체자아의 혼란 - 가령 멕시코에서 태어난 그들은 과연 스페인의 역사인가, 아니면 멕시코 자신의 역사인가 - 집의 소녀 아우라의 실존여부, 노파의 광기같은 것들이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분명 멕시코 근대 역사에서 스페인의 그늘에 눌려 타자화된 식민지 시대의 멕시코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작품은 전체적으로 매우 비이성적인 플롯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보통 보르헤스, 움베르트 에코와 더불어 가장 포스트모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대개의 중남미 작품은 이렇게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제3세계의 주체성 혼란과 억압된 것들에 대해서 '리얼리티'의 변형으로서 이야기 한다. 보르헤스, 로아 바스토스, 환 룰포등의 작가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푸엔테스와 마르케스, 아옌데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소설 형식을 텍스트에 부여하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기법적으로 자동기술법을 사용한다. 철저히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에 의해서 작품을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붓가는대로'쓰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야기의 진행은 소설Plot이라기 보다는 이야기Story이며, 개연성이라기보다는 '직관'에 의해 작품이 흘러간다. 이런 특징은 마르케스의 대작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모든 형식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이유는 철저히 '이성'과 '리얼리티 소설'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마르케스가 '신화'라는 것을 차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노벨문학상의 수상이유로 분석되기도 했던 프리마 파시Prima Facie를 이용하여 리얼리티로 굳어진 소설의 내러티브를 신화와 동급의 '환상성'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주10) 이른바 '소설의 죽음'이란 것은 그러니까 '리얼리티 소설의 죽음'이라고 정정해야할정도로, 마르케스의 소설이 가지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근대 소설의 어법을 철저히 파괴시킨 그야말로 신개념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현대 소설의 가장 중요한 유행중 하나이며, 중남미 작가들이 서구의 이성이 가지는 근대 소설의 어법을 해체하여, 중남미 토양에서 돋아날 수 있는 자신들의 내러티브로 재구축한, 성공적인 타자의 주체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문학내의 타자, 그들의 목소리 - 장르문학
비단 중남미에서만 이런 타자의 목소리를 문학으로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문학에서의 타자로 비껴있던 작품들도 문학적 목소리를 내는데 상당히 성공한 작품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J.R.R 톨킨과 조 홀드먼, 어슐러 르귄, 그리고 레오나르도 파두라이다.
J.R.R 톨킨이 20세기 문학에서 가지는 가장 커다란 업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장르판타지라는 문학의 서브 카테고리를 일구어낸 것도 있겠지만, 마르케스와는 다른 의미로 신화를 문학의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시켰다는 업적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톨킨이 이루어낸 가장 큰 위대함은 바로 문학 내에서 철저히 외면받아왔던,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취급받은 요정이야기Faery Tale를 바로 문학적 주체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아동문학이 정당한 문학의 멤버로 인정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점에서 톨킨은 환상문학뿐만 아니라 아동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흐름중 하나인 '장르 판타지'를 문학의 멤버로 소속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주11)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SF의 외삽을 이용하여 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인라인의 <스타쉽트루퍼스>와 같은 SF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하인라인이 보여준 전체주의 관점을 철저히 타자화시키면서 전쟁이 낳은 개인의 타자화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의 하나로서 SF적 특징이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슐러 르귄은 특유의 작품성으로 '여성'을 인간의 본격적인 문제로 올려놓고 있다. 브레드베리와 키플링, 토마스 핀천과 아이작 아시모프, 스타니슬라프 렘이 연이어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아 이런 SF장르에 문학적 힘을 실어주면서 20세기 SF문학이 한낱 펄프픽션에 머물지 않음을 증명했다.
한편 E.A 포에서 시작한 추리소설 역시 장르의 기법을 문학적으로 치환하여, 타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장르로 끌어올린 작가들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보통 노벨라 네그라Novella Negra라고 불린다. 주로 중남미에서 발전한 작품 양상이라 이렇게 불리는데,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쿠바 작가중 하나인 레도나르도 파두라는 그의 연작 <마스카라>에서 추리소설과 더불어 퀴어 담론을 문학적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이런 장르문학적으로, 그리고 현대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모두 장르문학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리얼리티로 특징지어진 소설의 어법을 장르적 어법으로 치환시키면서, 작품의 개성을 구축하고 리얼리즘 소설이 보여줄 수 없는 부분들을 건드리므로써 타자화된 주체를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는 요소를 안고 있다.
4. 매체의 개방 - 포스트 붐
위에서 보여준 타자의 문학적 특징들은 70년대를 넘어오면서 개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섞여서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작품들은 모두 '포스트붐'소설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장르문학적 특징과 타자에 대한 여러 소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작품의 테마를 상정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르케스의 세계적 성공 이후에 세계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포스트붐 소설의 특징을 간략히 서술하자면, 노벨라네그라, 장르문학, 마술적 사실주의가 지역, 국가, 문학 장르, 심지어 매체를 떠나서 자유롭게 연결되고 풀이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작가들은 주로 여류작가들이 많은데, 칠레의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멕시코의 에우라 에스키벨, 미국의 에이미 탄, 토니 모리슨, 한국의 오정희 등이다. 이들은 장르문학과 리얼리즘문학, 신화, TV드라마나 시트콤, 영화적 기법들을 문학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가의 개성으로 묶어놓은 '조립형 문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에서 지나치게 과장되고 세밀하게 묘사되는 - 마치 영화의 고속촬영과 줌인을 사용한 듯한 - 장면연결이라든지, 시트콤을 방불케 하는 상황연출의 연속인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틈새>, 일상을 소설화시키면서 존재하는 모든 타자들을 주체화시키는 문제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사랑받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이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현대인의 삶에서 완전히 밀려나있는 '죽음'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고오는 오정희의 <전갈>은 이런 점에서 1980년대 환상소설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이런 특징들은 90년대로 넘어오면서 훨씬 극단적으로 발전한다. 테마나 기법에 있어서 타자화된 존재를 주체로 끌고 오는 이런 방식이 이미 1990년대에 이르러 자유롭게 활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작품들이 쏟아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국적과 신분을 불문하는 작가들이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닐 게이먼의 경우는 <디스크월드> 3부작이나 <멋진 징조들>같은 작품들에서 오랜 세월 문학에서 버려졌던 우화-풍자문학을 가장 뛰어나게 인용한 작가로 이름남겨졌으며, 이것은 <하나님 끌기>로 일약 스타가 된 제임스 모로에게까지 연결되고 있다. 척 팔라닉은 <파이트클럽>에서 아주 헐리우드적인 발상과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을 기묘하게 배치하는데 성공하였고, 닉 혼비는 영국 시트콤이 가지는 코미디의 매력을 문학적으로 흡수한 성공적인 경우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90년대 이후 문학의 특징들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났으며, 작가의 개성에 따라서,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1990년대에는 포스트붐 소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가들의 개성으로 점철된 독창적인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난다. 아르토 페실리나의 <목매달린 여우의 숲>(핀란드), 응구기와 시옹오의 문제작 <한톨의 밀알>(케냐),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일본),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인도),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의 빨강>(이란), 아멜리 노통의 <적의 화장법>(벨기에)등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어느 면에서는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특징을 포함하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군은 작가의 지역-문화적 특성, 작가의 개인적 환경, 작가가 거주하는 국가의 문학적 색채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독창적 결과물들이다. 한국에도 1990년대 이후에 윤대녕, 박민규, 김영하, 한유주 같은 작가들이 환상문학의 위치에서, 그리고 현대문학의 위치에서 독창적인 개성을 가진 작품들을 남겼다.(주12)
5. 한국 환상문학의 전개
지금까지 우리는 20세기부터 주목을 받아온 소위 '환상문학'의 문학사적 특징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조망해 보았다. 20세기 문학의 주인공은 소위 말하는 제3세계 작가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한데, 그것은 유럽 근대의 리얼리티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리얼리트를 재건축하려는 그들 나름의 결실이었으며, 이를 자양분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매우 풍부한 '조립형 문학'이 가능해졌다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환상문학은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혹은 한국 환상문학은 전개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진행중인가? 이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며, 고찰해보아야할 필요가 있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우리는 다소 상투적이더라도 '한국적'이라는 특징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민족적 개념은 대개 매체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정서적 유산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지며, 이런 정서적 유산은 정신문화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조금 더 확대해석하면 신화에 그 뿌리를 두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주13) 따라서 많은 판타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깨비와 암행어사가 나오고, 부적이 등장하는 것이 동양적- 혹은 한국적 판타지가 아님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 문학사적으로 살펴본다면, 마술적 사실주의는 굳이 인디언들이나 재규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라틴 아메리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형 판타지 소설로 읽힐 수 있다. 왜냐면, 환 룰포나 보르헤스, 푸엔테스등 일련의 라틴 작가군들의 작품에는 식민지 시대에 타자화된 자신들의 가려진 역사의 조각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14)
이들의 테마는 분실된 자신의 옛 얼굴과 조상들의 초상화를 찾는 일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로 변주되면서 중남미 문학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미권 제3세계 작가들 역시 영어문화와 자국 토속 문화의 불협화음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주15) 이는 정서적 측면이 문학의 지류를 가를 때 매체적 측면보다 훨씬 중요함을 반증하는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이러한 서구 이성의 해체적 산물로서의 텍스트가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 가장 첫 번째의 지류로서 구인회의 멤버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특히 박태원과 이상은 그 안에서 가장 독보적인 환상적 작가들이었다. 두 작가는 <무정>이후 정착된 근대 소설의 기법에 회의를 품은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그것은 기법의 파괴에 대한 한글적 변용으로 드러났다. 한문장으로 구성된 소설 <방란장 주인>이나 띄어쓰기를 파괴하고 한자와 한글의 유희적 사용이 돋보이는 이상의 텍스트들은 환상성을 재쳐두고서라도 소설의 서사적 문체를 한글로 사용하려는 최초의 시도로 평가받을만 하다.
구인회 작가 중에서 다다이즘의 성격이 두드러졌던 이상의 경우 환상적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지주회시>나 <휴업과사정>같은 소설은 매우 뛰어난 자의식기법과 의식의 흐름을 사용하여 자아의 내부를 파헤치는 심리적 경향의 환상소설을 보여주었다. 이상의 경우는 테마적으로 현대인의 정신착란적 광기들을 즐겨 사용하였고, 문체적으로는 서사적 문체를 한글이라는 언어매체를 이용하여 변용시키는 최초의 사례로서, 근대 서구 소설의 문체적 리얼리티를 한글적으로 재정립시킴과 동시에, 1900년대 초반 경성 조선인을 타자화시키는 독보적인 케이스로 눈여겨볼만 하다.(주16)
채만식의 경우 역시 한국 특유의 해학을 바탕으로 소설의 리얼리티를 부여하는데 성공한 작가로서, 이 경우 역시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한국의 해학을 소설로 풀이한 독보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로 1960년대까지 특별히 환상성의 측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들은 발굴되지 않았다. (주17)
리얼리즘이 초강세를 보이던 70년대에 우리는 한국 환상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박상륭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환상소설가다. 그의 대작 <죽음의 한 연구>는 사실상 한국문학이 이루어낸 가장 훌륭한 쾌거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우선 이상 이후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서술문체의 한국시적 사용을 가장 완성적으로 사용하여 서사적 내러티브를 완전히 한글로 정착시킨 모범적인 사례로 남겨질만 하다. 문체는 판소리 사설에서나 사용될법한 만연하고 구어체적인 특징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서술적 체계가 아주 적절한 비율로 배합하고 있다. 이를테면 "공문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속중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 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라는 압도적인 작품 첫 머리는 곡유법이 미덕인 한글 판소리의 성격에 소설의 서사를 더하여 이루어진 가장 이상적인 시적 문체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런 문체가 작품 첫머리부터 작품 끝까지 치밀하게 끌고나가면서 문장하나하나마다 거대서사가 조금씩 얹혀져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 주제가 형이상학적인 면이 많다보니, 주제를 형상화하는 이야기가 모두 내재적 리얼리티로 꽉 찬 환상담으로 구성되어, 작품의 환상성이 문체에 그대로 녹아있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매력을 가진다. 이미저리로 점철되어 묘사가 강조되는 여타 '시적이라 불리는' 한국 판타지소설과는 그 성격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미지 중심이 시적 묘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시적묘사가 서사에 온전히 녹아있는 소설은 극히 드물다. 물론 이것은 작가 박상륭의 개성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한국 소설이 가지는 가장 유니크한 특징의 한 부분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고 말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서양의 근대소설의 주체를 해체한 다음 타자로 상정되는 문화에서 서사의 리얼리티를 재구축한 것이 포스트붐 소설의 특징이라면, 바로 이 점에서 <죽음의 한 연구>는 한국형 포스트 붐 소설의 대표적인 전형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작품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죽음의 한 연구>이다. 여기에서도 박상륭은 카발라, 연금술, 융심리학과 불교의 선사상을 이중적으로 배치하여, 주체가 되는 거대종교적 테마를 비교적으로 치환시키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이 작품에서 종교와 비교는 모두 '죽음' 앞에서 해체되고, 변증적으로 상승한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죽음의 한 연구>는 죽음에 대한 서양적 텍스트에 대한 동양적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역시 서양 철학에 의해 타자화된 동양 사상에 대한 주체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은 노자의 자연변증법과 비슷하게, 죽음 앞에서 동서가 해체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분명 익숙한 근대 리얼리티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러한 박상륭 소설의 특징은 <칠조어론>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오정희의 작품들은 시대적으로 마땅히 나왔어야할 시기에 당연히 나왔어야할 작품성과 성격을 가진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완구점 여인>이나 <유년의 뜰>처럼 초기에는 리얼리즘에 기반하여 일상의 문제를 접근하는 텍스트들이 주를 이루어지만 중기로 가면서, 이런 한국의 전형적인 리얼리트를 일그러뜨리면서, 산업화 시대의 도시인이 가지는 무관심과 심연에의 응시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래서 리얼리티와 환상이 기괴한 만남을 하고 있는 이른바 '한국형 환상적 사실주의'작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전갈>, <야회>, <밤비>, <인어>등 <바람의 넋>에 수록되어있는 그의 단편소설들은 분명 1930년대부터 맥을 같이한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도회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접근하는 테마에 따라서 심리적 방법으로 일상을 기괴하게 왜곡시킨다. 군인에게 약을 지어주면서, 금고에 담긴 청산가리와 기억 사이의 갈등을 은연중에 표출하는 <밤비>나, 한국에서 이질적인 대상인 하나의 곤충을 타자화 시켜 권태와 죽음을 동일시 한다음, 감정이입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소설적 특징을 가진 <전갈>등은 80년대 가장 중요한 한국 단편소설중의 하나로 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를 이어가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조롱하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 실존적 경향의 심리소설로 시작한 서정인은, <미로>에서 환상을 통한 현실의 광대놀음을 카프카와 같이 표현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대개 그것들은 거대한 사회의 매커니즘에 물화된 인간의 소외감을 표현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연작소설 <달궁>부터는 한글 문체의 상투적 표현과 묘사적 접근에 대해 의문을 품더니, 결국 <용병대장> 3부작에서 서양 소설에 대한 한국적 수용에 대한 심도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은 현재 진행형이며, 한국 환상소설이 가질 수 있는 기법적-정서적 가능성에 대한 또 하나의 출구이다.
시는 장르의 특성상 환상의 회복시야가 없이 창작이 불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에 모든 시가 환상시라고 정의내릴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회복의 시야가 매우 진한 시인들로서 전봉건, 박용래, 김종삼 등의 시인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다.
6. 개인의 시대 - 90년대~현재
윤대녕의 소설은 리얼리즘의 옷을 입은 교묘한 환상소설로서, 그의 작가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로 작용한다. <빛의 걸음걸이>나 <천지간>에는 박상륭처럼 환상적 묘사나, 오정희와 같은 리얼리티의 일그러짐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익숙한 인물, 익숙한 사건, 익숙한 장소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이야기의 연결고리 - 플롯 - 의 매커니즘을 작가의 개성으로 빚어내므로써, 작품 전체에 대단한 환상적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다. <천지간>은 작가 윤대녕의 알파이자 오메가로서, 1990년대에 유행했던 로맨스소설적 터치와 리얼리즘적 설득력, 내재적 리얼리티를 모두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윤대녕과 공지영, 최윤의 등장 이후로, 한국 소설은 대중소설과 본격소설의 경계가 급격하게 허물어졌는데, 90년대 후반 그 틈을 타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영화와 TV드라마, 장르문학을 조립하는 김영하, 여성 특유의 댄디즘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묘사하는 배수아,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트레이드마크가 된 박민규, 영화적 기법을 소설로 끌고 오는 천명관, 각종 대중매체의 어법들을 자유자재로 소설에 삽입시키는 김연수, 현대인의 우울한 변두리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한유주 등의 작가들이다. 이들은 문예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위에서 지적한 한국적 포스트붐 소설의 조류는 아니지만, 1990년대 전세계문단에서 급물살을 탄 '조립식 문학'을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한국 현대 문학의 특수현상으로서 연구되고 읽히고 있다.
7. 장르문학으로서의 판타지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판타지소설'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한국적 판타지가 존재할까? 물론 문학의 환상성의 측면에서 이런 특징은 문학을 즐기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상기한 것처럼 한국 환상소설의 대부분은 한국적 환상성을 가진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개인주의가 강해지는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화적 환경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이 중시되는 경향이 반영된 듯 보인다. 따라서 환상소설의 특징은 문화적-국가적-지역적 특성 보다는 작가 개인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해 결정되는 요인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에서 발을 담그고 있는 장르문학 작가들이다.
듀나는 오랜기간 활동한 영화평론 경력과, PC통신 시절의 경험, 그리고 장르적 관심이 십분 반영된 상호텍스트적 작품들을 남겼다. <태평양 횡단특급>과 <나비전쟁>은 장르적 접근이 가능한 테마를 가지고 문학적으로 입혀서 사용한 경우이며 <면세구역>은 컨텍스트의 페스티시를 극한까지 사용하는 재기를 보여준 작품이다.
김중혁은 본연의 순수문학적 기질과 SF문학의 관심, 그리고 '아날로그의 향수'를 적절히 배합하여 <펭귄 뉴스>라는 이색적인 작품을 펼쳐보였다. 이 작품은 형식주의적으로 보아도 지극히 대중소설에 가까우며, 어법적으로는 장르문학이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문학 그것의 옷을 입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조립의 도구로서 장르매체들이 존재하며, 그걸 묶어주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려있다.
대다수의 90년대 후반 '판타지 소설 작가'들의 경우 유럽 판타지소설에 기반을 둔 RPG게임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영도는 TSR의 게임 던전앤드래곤즈(이하D&D)의 세계관과 톨킨류의 캠페인을 바탕으로 <드래곤라자>를 썼고, 일본식 RPG와 비쥬얼 노벨의 성격이 짙은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방지나의 <마왕의 육아일기>등, 절대다수의 판타지 소설들은 장르판타지에 영향을 받은 만화,RPG게임등의 하위매체의 영향을 받아 재생산된 작품들이다. 홍정훈의 <비상하는 매>의 경우 스티브 잭슨의 <먼치킨 핸드북>에 드러나는 루니형 캐릭터를 적절히 활용한 패러디-경이소설로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작가들의 특징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지만, 아쉽게도 이것이 문학적 특수성을 획득한 경우는 드물다. 1부에서 언급하였지만, 이 경우 장르적 어법에 지나치게 치중하여, 작품을 쓰는데만 집중이 되었고 문학적 환상성에 대한 작가의 진중한 접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보면 장르 소설가들의 한계점이기도 하며, 굳이 문학적 특수성을 획득할 필요 없이, 장르적 게토 안에 거주하는 작품으로 존재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르문학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노력을 했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이영도와 전민희였다.
<드래곤 라자>로 스타덤에 오른 이영도는 자신의 캠페인이 너무 톨킨의 그늘에 가려져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 <퓨쳐워커>나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장르적 창조성을 염려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끌고 나갔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이 다양하게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오버더호라이즌>인데, 여기서 그는 '2차세계'가 약속되는 판타지소설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2차세계를 창작하는 '문법'을 새로 작성하여 독자들에게 참신한 시야를 심어주는 데에 성공하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그는 대하소설에 가까운 <눈물을 마시는 새>시리즈로, 전혀 새로운 캠페인과 내러티브를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영도가 동양적 세계관을 가지고 '한국적 판타지'를 쓰려고 했음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인데, 한국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꽃에서 자라는 용'이라든가, 인도 신화에서 빌어온 '레콘', 굉장히 독자적으로 차용한 '두억시니'같은 캐릭터들은 신화 인간, 세계의 조화를 테마로 하는 이영도의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한국적인 작품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내러티브 적으로, 그리고 기법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드래곤 라자>의 연장선이며, 장르 판타지로서의 특성과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눈물을 마시는 새>의 소재들은 매우 동양적이지만,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국가관과 소설적 주제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역동적 내러티브는 서양의 장르 판타지소설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동양 고전 환상소설 - 이를테면 산해경이나, 한국 신화, 요재지이 등 -에서 보여지는 타종족과의 조화와 융합의 특징들이 전혀 보여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동양 고전 판타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얻어낼 수 없는 부분이다. (주18)
문체는 가장 치명적인 이영도의 약점으로 꼽힌다. 그의 문체는 <피를 마시는 새>까지도 톨킨류 민스트랄 금언의 변형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진지한 한글적 사용의 고민을 그다지 하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 따라서 문체-기법적으로 이 작품은 전형적인 번역체 한국 장르판타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의 돌>로 명성을 얻은 전민희는 <태양의 탑>과 <룬의 아이들>을 통해서 그의 소설방식이 점차 문체에서 서사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직선적이고 단순한, 그러면서 불협하는 플롯을 가지고 있던 것이, 민담의 내러티브를 사용하는 굉장히 정제된 플롯 양식으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윈터러>는 그 훌륭한 결과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민희는 현재 장르판타지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들을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 한명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거대서사의 치밀한 조직, 단순한 민담 서사를 소설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드러나는 문체적 한계점들이 그녀를 마르케스나 어슐러 르귄과 같은 대열의 작가로 올려놓기에 망설임을 만든다. 마르케스와 전민희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스케일을 풀어나가는 '글재주'에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을 대표할만한'이라는 레테르를 수여할만한 장르판타지 소설을 들고 나온 작가는 보이지 않는 듯 하다.
8. 맺는 말
20세기 초에 리얼리즘을 해체할 가장 강력한 희망으로서 등장하였던 환상소설은 90년대가 지나가면서, 다시 해체되야할 대상으로 도마에 올랐고, 변증적으로 해체되면서 조립형 현대소설의 소재로 다루어 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환상소설'과 '판타지소설' 작가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의 경우 문학의 입장에서 도구의 하나로 판타지를 사용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전적으로 장르판타지의 어법에만 묶여 있다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뛰어난 NT소설로도 읽힐 수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도마뱀>같은 경우는 이런 우리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수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이 단편집에 드러나는 인물들은 <풀 메탈패닉>이나 <슬레이어즈>같은 과격함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키노의 여행>이나
<공의 경계>가 가지는 정서는 공유하고 있다. (주19) 이것은 일본 문화의 통섭적 성격이 현대 문화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더불어 박민규나 김중혁의 장르소설이 문단에 어필하면서도 이영도와 전민희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로저 젤라즈니는 장르문학 안에서 반대의 시도, 즉 장르문학 내에서 모더니즘 문학의 시도를 조립해 나가면서 매우 독자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를 병행하는 작가들이 늘어난다면, 한국 장르문학의 폭 역시 매우 넓어질 것이다. 한국적인, 한국에서의 판타지가 특정한 어법과 소재, 정서에만 묶여있는 것은 아니며, 1990년대 이후의 환상문학의 소재는 개인주의적으로 치달으며 매우 잘게 쪼개지고, 곱게 빻아졌다. 마치 2000피스짜리 직소퍼즐과 같이, 그것은 순전히 조립하는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 대한민국에서, 우리말로 씌여지는 환상소설이라면,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 분명히 존재하며, 유럽의 리얼리티를 주체적으로 해체하여, 다채로운 '조립의 재료 매체'를 가지고 새로운 환상과 새로운 언어로 신선한 내재적 리얼리티를 구축해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값진, '한국 판타지'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2007.12.16 AM 03:58
----------------------------------------------------------------
주1) 하버마스, <탈 형이상학적 사유>
주2) 서양의 '철학'은 그러므로 플라톤에서 시작되고 끝난다고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다. 20세기 과학철학자이기도 했던 화이트헤드는 그래서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주3) 이 점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서도 거듭 지적되는 부분이다.
주4) 하버마스는 이에 대해서 과학의 철학화에 의해 20세기 철학은 크게 네 가지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탈 형이상학적 사유'라고 정리하고 있다.
주5) 이것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의 결말부분에서 돈 키호테가 자신은 영웅이 아님을 '인식'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주6)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주7)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 토마스 만 (<변신.카프카> 민음사 설명 中 인용)
주8) 첫 번째는 그의 작품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테리온의 집>, <신의 글>같은 단편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으며, 두 번째는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여지는 '상호텍스트', 그리고 세 번째는 E.A 포와 연결되어 있는 추리소설 형식의 문학작품들이다.
주9) '너'를 주체로 하는 '2인칭 시점'의 서술방식은 21세기 세계문학 소설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한국에서도 듀나와 김영하가 몇몇 단편에서 실험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주10) 이에 대해서는 문학사상 1983년 12월호 <마르케스 특집>을 참고하라.
주11) 톨킨의 중요한 저작중 하나인 <Tree & Leaf>가 지금에 와서야 아동문학 연구가들에게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12)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주13) 이에 대해서는 제임스 프레이저를 비롯한 <제의학파>와 엘리아데를 비롯한 <시카고 학파>의 종교학 이론을 참조하라.
주14) 환 룰포의 단편 <루비나>의 경우 식민지와 개척, 유랑이라는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독특한 역사를 중남미 특유의 '환상적'묘사로 스케치하는데 성공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15) 이는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 응국기와 시옹오의 <한톨의 밀알>,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존 쿳시의 <포>등에서 잘 드러난다.
주16) 그의 작품은 작가적으로나 국문학적으로 매우 독창적인 위치에 있음은 첫째로 작가적 특성이 테마에서 드러나고, 둘째로 근대 유럽소설의 문체를 해체하여 한글로 재건축했다는 데에 있다.
주17) 1920~1940년대까지는 한국 문학의 르네상스기로서, 짧은 기간동안 유럽의 거의 모든 문학 스타일이 한국에 수용되어 작가들마다 자신의 스타일로 각종 유럽문예의 흐름을 받아들여 풍족한 결과물을 남겼으며, 그 중에 이상과 박태원은 환상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환상시의 면에서 특기할만한 시인으로 김광균과 이상화가 있는데, 둘다 상징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주18) 보르헤스가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핵심인물로 부각시킨 것은, 그가 소머리에 인간몸이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인에게서 추방당한 어보민Abormin이라는 타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이 작품에서 아스테리온은 작품의 시야를 뒤집는 신선한 '경이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두억시니에 대한 동양신화의 관점에서 두억시니의 존재는 신 이전의 '혼돈스러움'이고, 이영도는 이 점을 재해석 한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소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두억시니의 원래 원형적 아우라Aura는 중국의 혼돈(混沌)과 같은, 신 이전의 종족을 뜻하지만, 이영도는 이 작품에서 두억시니의 태생적 배경을 전도시키므로써, 동양 신화에 대한 새로운해석을 집어넣지는 않고 있다.
주19) 사실 반대의 경우지만, 일본의 NT소설의 경우 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사이의 일본 소설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 by | 2008/02/17 12:28 | 퍼온글 | 트랙백 | 덧글(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환상문학,에 관심이 많은데- 사실, 대여점에서 쉬 빌릴 수 있는 판타지 소설에는 손이 잘 안 가게 됩니다. 중학교 때 읽었던 '퇴마록'을 다시 읽으려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딱히, 폐쇄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졸업까지 한 마당에 싫은 책을 굳이 참아가며 읽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그나저나, 이 글, 퍼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겠군요-
저만큼의 독서력과 저만큼의 문장력과 저만큼의 구성력을 가지려면- 타고나기도 타고났을테지만, 부단히 써댔으리라 짐작합니다.
뭐, 부럽기는 합니다만ㅠ
말련에 정말 시간이 남아 돌긴 했나본듯.